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는 1939년에 잡지 «여성»에 발표된 작품이다. 본래 근대 문명을 동경했으나 냉혹한 현실에 좌절하고 마는 당대의 지식인을 나비에 빗대어 쓰여진 시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런저런 생각을 모두 거둔 채 처음 시를 읽었을 때, 이 시는 이미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열아홉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는 내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사회의 현실을 오롯이 보여주며 설렘과 기대에 속에 잠겨가는 나를 꺼낼 사람도, 그럴만한 명분을 가진 사람도 없다.
나에게 스무 살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책임이 부여되는 무거운 시작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완화되는 제재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확장되는 시기, 그 초입이기도 했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그 시간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것에 진정으로 설렘을 느꼈다.
언젠가 엄마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 생각을 들은 직후에는 나의 감정과 마음가짐과 가치관에 대해 '치기 내지는 객기'라는 짧은 대답을 해주셨지만,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엄마의 열아홉 시절에는 스무 살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떠올려보며 많은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55일이라는 짧은 스무 살을 보내고 이 시를 다시 읽어보았다.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는 많은 어려움을 보았다. 부모님의 감사한 보호가 없다면 추운 길거리에서 몇 날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수단과 같은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쳐서 돌아오고 좌절해도 그 시간을 양분 삼아 더 멀리 더 높이 나는 나비가 될 것이다. 흰나비가 파랗게 물들지언정 나비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마냥 연약하고 하찮아 보일 작은 나비는 아직 광활한 세계의 입구 앞에 머물러 있지만 그것마저도 설렐 뿐이다.